백제가 멸망 전에 왜(倭)의 중국 왕래를 도와주던 상황을 보여준다.
『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왜 한 쪽 방향으로만 확산해 나갔는지 의문이 따른다.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
[사진 위키피디아] 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년.타이완이 해양문명권에 머물러 있던 반면 류구는 대륙문명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일찍 알려진 것이다.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중·일 사이에서 번영한 류구 왕국류구국 왕궁 슈리(首里)성에서 나하(那覇)시를 내려다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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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정복 7년 뒤 사라져 오키나와현으로 7세기 동아시아 문명권 성립1761년 무렵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방문한 류구왕국 사절단의 모습.타이완은 이 어족 분포 지역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선 위에 있다.